내가 추구라는 삶은 무엇일까..
생각할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내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예수를 나타내고있는가..
예수님을 고려하며 예수님을 닮은 삶을 보여주는 있는가가 날마다 나를 측정하는 날카로운 잣대이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시기에 우리 역시 빛 가운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게되면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므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안에 머무르게 되므로 주님을 닮아가고 세상과 살면서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누릴수있다.
문제는 주님과 단둘이 있는 시간에 교제하는게 어려운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교제하는가가 더 어렵고 디테일 하다는 것이다.
어제 집사님들과의 교제에서 주의에 얼마나 많은사람들이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일하는사람들을 막 대하는가에 대해 말하면서 참 대책이 없다는 대화가 오갔다.
남편이 말하길 그런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하는게 우리의 사명이 아닌가 이야기 하면서 정말 기도하면 내가 그들을 변화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변화시켜 주더라고 본인 간증을 하였다.
정말 그렇다.
우린 모든 일에 개관적으로 바라보고 내가 무슨말을 해야할지 고민하거나 판단하거나 해결할것이 아니라 주님께 모든걸 맡기고 우리가 보여지는 모든상황을 기도로 주님께 맡기고 중보하는길이 제일 빠르고 빛가운데 사는 거룩한 길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내가 기도로 변하면 고민이 떠나가고 세상사람들이 궁휼한 마음으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흐르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가 변해야한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
예수님의 성품을 나타내야하는 것이다.
우리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온전하게 나타나기위해 성령안에서 기도해야한다.
성령안에서 기도하다보면 성령께서 나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성령께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신다.
결국 예수님이 원하시는것은 이것이다. 라고 말씀으로 밝히 말씀해 주신다고 여긴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충분히 기도하는가에 달려있다.
우리는 너무나 기도하는것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정말 기도에 게으르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기도에 게으른가 점검하며 애통해하고 나의 모습을 인정해야하는데 그런 모습은 많이 타협하기 일쑤다.
주님이 원하시는것은 충분한 기도이다.
기도는 충분히 해야한다.
기도의 독이 찰 때까지 말이다.
예수님께서 첯번째 이적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때 말씀하시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 말씀은 기도로 항아리를 가득 채우라로 들린다.
주님이 원하시는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시다.
겉으로 사람들에게 보이는 크리스챤이 아니라 하나님자신을 닮은 모습을 내면에서부터 온전히 나타내라는 말씀이라고 본다.
이것은 성령께서 내 영을 만질때 내 안의 모습이 들어나고 자연스럽게 주님과 교제하는가운데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성향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바꾸어가는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만이 가능하다.
성령께서 나의 못난 모습을 보여주어야 비로소 처절하게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성품이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항상 빛가운데 우리는 살아가게 되리라 믿는다.
날마다 매순간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하는 이유는 빛가운데 거하며 주님과 교제하며 살수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