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로그인
    • 전도서 1-3장

      날짜 : 2017. 05. 22  글쓴이 : 장지수

      조회수 : 2205
      추천 : 0

      목록
      • 전도서1장

        세상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자의 묵상입니다. 설교자, 교사, 총회의 인도자 또 지혜자인 이스라엘 왕이라고는 하지만 저자도 일개 인간일 뿐이며, 인생을 살며 많은 지혜를 쌓은 그가 세상에 남길 것은 또 하나의 무상無常의 고백 뿐입니다. 삶을 돌아보는 그는 지쳐있고 그의 눈에 비춰지는 세상 만물 역시 지쳐있는데, 이것은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주님의 영화로움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요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그 영화로움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신 것이여서 그 표현된 섭리에 감히 인간이 더하거나 뺄 것, 새롭게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하여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쫒겨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세상만물의 주인으로 오해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수고에 딸려오는 굶주림과 해산의 고통후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죽음 뿐입니다. 누구도 이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고 세상에서 자신을 영화롭게 할 수 없음이 고이고는 다시 흐르는 물에, 모였다가는 다시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떠오르고는 다시 지는 태양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섭리 앞에 인간이 자신의 머리위에 스스로 씌운 왕관이 초라하고 부끄럽기만 합니다. 멍에를 씌워 가축을 부리고 돌을 깎아 궁전을 쌓아도, 밭을 갈아 곡식을 얻고 꽃을 심어 아름답게 가꾸어도, 이런 부질없는 인간의 노력에 만물은 쇠해가기만 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만 얼굴을 돌리고 인간의 주권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통상 솔로몬으로 간주되는데, 열왕기상 3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솔로몬이 받은 지혜는 하늘로부터 내린 은사이고, 그것은 그가 잠언 9:10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라고 고백한 것 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의 저자는 지혜를 자신의 삶의 노력의 결과물인양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에 대해 말할 때의 주어가 항상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받은 지혜가 하늘의 소산이라면 전도서 1장에서 저자가 말하는 지혜는 에덴 바깥의 땅의 소산으로, 앞서 말한 것 처럼 굶주림과 공허함만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깨달음에서 나오는 고백이며 참회록입니다. 오해로 인해 하나님과 온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전도자, 그는 지친 눈을 들어 만물의 주이신 하나님께 인간이 지어드린 성전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사야 66:1에서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받침대다. 그러니 너희가 어떻게 내가 살 집을 직겠으며, 어느 곳에다가 나를 쉬게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성전이 아니라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지혜자는 바람을 잡으려고 헤메이다 기력이 쇠했고, 태양을 이해하고자 하다가 두 눈이 상했습니다. 그 지친 몸을 누일 궁궐은 있었지만 그 영이 쉴 곳은 세상에 마련하지 못한 그의 지친 눈에는, 어쩌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역시 사람의 손에 의해 허물어지는 모습도 이미  아른거리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로부터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상한 마음밖에는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서 받으실 것도 그 밖에는 없는 줄로 압니다. 



        전도서 2장

        계속해서 지혜자의 실망의 내용입니다. 그는 진리를 찾아 헤메이는 과정에서 본능적인 욕구들을 만족시키려고 육의 양식을 찾다가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돌려 창조주 하나님을 모방한 다양한 사업에 착수합니다. 자신이 이룩한 것을 돌아보고는 마치 전지전능한 조물주가 된것같은 착각에 취하여 만족을 느낍니다. 그의 모든 찬란한 성취와 함께 자신의 명성도 영원할 것 같이 느껴집니다. 지혜가 언제나 함께한 그는 이처럼 쾌락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한 인생의 규격을 넘어서 더욱 가치있고 거대한 것, 영원하고 완벽한 것을 향해 나아가지만 곧 인간의 한계, 삶의 막다른 골목에 당면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또 지혜자 자신도 결국 바람에 흩날리는 흙먼지가 될 운명이라는 사실이, "원하는 것은 다 얻었다.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지 삼가지 않았다. 나는 하는 일마다 다 자랑스러웠다. 이것은 내가 수고하여 얻은 나의 몫인 셈이었다." (2:10) 라고 말하던 솔로몬에게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마치 임종을 닾둔 환자가 절망중에 잠시 보던 단 꿈에서 깨어 한탄하듯이, 그는 모든 것이 헛되고 아무런 보람도 없으며, 자신에게 세상 모든 것을 가져다준 지혜도 소용이 없고, 죽으며 자신의 몫을 취하지 못함이 억울하고, 인생이 가증스러우며, 평생이 괴로움과 슬픔뿐이고, 마음에는 실망밖에 없다고 단숨에 토로합니다. 이같이 비참한 고백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왕좌를 형틀처럼 느끼며 그는 일개 농부의 몫을, 어쩌면 들개의 몫을 시샘했을것 같습니다. 인생에 대해 지혜자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고백합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2:24) 육신의 필요를 알맞게 채우며, 에덴에서 스스로 왕됨으로 인해 쫒겨난 인간의 몫인 삶의 수고로움으로부터 보람, 즉 자신의 자리와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함으로 얻는 영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것이 행복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자가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슬기, 지식, 기쁨을 주시고" (2:25)라는 말씀에 나와있는, 어리석음의 길을 걷지 않는 슬기로움, 인생의 한계에 대한 지식, 헛된 욕심 없이 자신의 몫에 만족하는 기쁨으로 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땅의 몫뿐만이 아니라 하늘의 몫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 다윗이 사울로 부터 쫒겨 굴에 숨어있는 중에 다음과 같이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내가 받은 분깃은 주님뿐' 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너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짖으니, 내게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그들이 나보다 강합니다. 내 영혼을 감옥에서 끌어내 주셔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 내게 넘치는 은혜를 베푸시니, 의인들이 나를 감싸 줄 것입니다." (시편 142:5-7)

        이 땅에서 내 영혼이 평안하며, 나의 진정한 분깃인 천국만을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전도서 3장

        전도자의 지혜는 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이 땅 위의 삶은 헛되다" 는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서, 혹은 인간의 지혜의 한계를 표현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지만, 영생 또는 하나님과 하나됨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이 점이 3장에서 특히 부각되는것 같습니다. 여기서 보여지는 모든 것이 때를 따라 일어나고, 과거가 되풀이되는 세상. 사람이 다 알 수도, 무엇을 더하거나 뺼 수도 없는 세상은 , 어떤 사람들을 윤회의 논리의 길로, 또 허무주의의 길로 이끌어가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아래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지만,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라고 하는 그의 말은, 같은 구약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었으며 영생에 대해 노래했던 이사야와 다니엘, 특히 같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의 말과 강하게 대조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시16:10-11

        전도자는 삶에 실망하여 인생의 부질없음을 고백했지만, 그의 마음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5)는 계명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움과 경외함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은 느꼈지만, 만물에서 나타나는 사랑의 하나님을 느끼고 그 사랑에 화답하는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똑같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철두철미한 섭리안에 있는 광활한 세상에서 다윗은 은혜를 느끼고 "인자가 무엇이건데" 라고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완성까지 창조하신 7의 세계의 육신의 안식의 벽을 넘어서 주님께로 갈 것을 알고는, 시편 23편에서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자는 모두 이렇게 고백할 줄로 압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 품으로 부르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깨달음은 세상의 지혜에서 오지 않습니다. 또 그 어떤 지혜도 줄 수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줍니다. 허무한 세상으로 나를 찾아오셔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안아주시는 나의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신고하기

    • 추천 목록

    • 댓글(0)

    • 글을 작성시 등록하신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