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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도서 4-6장

      날짜 : 2017. 05. 22  글쓴이 : 장지수

      조회수 : 2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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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도서 4장

        전도서 4장 4절 말씀입니다: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새번역성경)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개역개정)

        내가 갖고 싶은 것들,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들, 해 아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선 모든 것들은 사람이 자신을 높이려고 세운 것들입니다. 이 땅의 삶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땅의 것들을 기준으로 자신을 높입니다. 사람은 가문, 학벌, 직장, 재산, 기호등으로 구성된 매우 복잡한 정체성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이를 두고 서로 비교하고 시기하고 남보다 더 나으려고 노력하다가 자신의 부족한 면이 부각되면 큰 상처를 받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는 존재가치에 위협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쫒겨나서 서로를 원망했을 것입니다. 삶의 고난을 함께 하면서 자신에게만 쓰인것 같은 굴레와 상대에게만 있는 것 같은 특권을 보고 불만을 품었을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에도 그들이 에덴이 계속 머무는 것이 설령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버린 그들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로부터 숨어버린 그들은 어두운 곳에서 전지전능한 창조주를 원망하고 시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을 비롯한 그들의 자손들도 시기와 경쟁심으로 서로를, 또 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서로에게 거울과 같은 존재로 서로의 불완전함을 보여주고 우월감과 열등감, 멸시와 시기등의 감정으로 서로를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남에게 나를 인정하게 하려고 노력하며 허송세월합니다. 골치아프게도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서 혼자 살 수도 없습니다. 둘 이상일 때에 힘을 합하고, 넘어진 자를 일으켜주고, 함께하며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혼자 살며 노력하고 애써도 낙이 없고, 채워지지 못하는 마음때문에 남을 억압하고 또 억압받습니다. 홀로 왕위에 올라 높임을 받아도 그 권세와 업적은 곧 세월속에 흩날립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이 용도에 맞게 사용될때만 우리는 보람과 만족을 느낍니다. 나의 모습, 나의 업적등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은 영광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이 손상되지 않으며 내가 어떤 한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 자신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하는 것이 삶의 불행의 이유입니다. 피조물은 지으신 그대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벌거벗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또 세상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헛된 세상적 노력과 공로를 의지해서 살아가려고 할 때에 공허함 속에 실족하고, 그 그릇된 본보임과 시기심을 부추기는 것으로 인해 남도 실족케 합니다 죄가 죄를 낳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처음에는 거리낌 없이 벌거벗은 체 다니다가 영문도 모른체 점점 어른들의 본을 따라갑니다. 어느세인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노력과 성취와 시기의 세상에서 챗바퀴돌기 시작합니다. 이런 죄의 연쇄를 끊고 자유로워지려면 세상에 대하여 죽고 낮아지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됨으로 예수의 본을 따라 높아질 것입니다.


        전도서 5장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라, 말씀을 들으러가서 함부로 입을 열어 많은 말을 하지 말고, 또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켜라." 7절이 이 명령들의 요약입니다. "오직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만 알고 살아라."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많은 집회와 설교에 감동해서 마음에 품고 입 밖으로 낸 결심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약 6년전의 GKYM 집회에 가서는 머지 않은 미래에 일년동안 단기선교에 갈 것을 기약했었고, 몬트리올 교회들이 연합해서 개최한 한 집회에서는 '이곳 몬트리올의 찬양의 부흥을 위해 쓰임받기 원합니다!' 라는 식의 기도도 드렸었습니다. 지금 토론토 땅에서 생계를 꾸려나가며 돌아보니 이런 당돌한 다짐들과 지금은 기억조차 못 하는, 아마 많을 과거의 서약들 생각에 한숨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가시방석입니다. 얼마나 하나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으면 그렇게 감정이 시키는데로 그럴싸한 말들을 내뱉었을까, 아니 어쩌면 마음이 감동되어 세상도 나도 보지 않고, 계산없는 마음으로 한 순수한 말이었을까... 어쨌든 어떻게 나의 한 말들을 감당할까 고민을 하다가 나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맹세하지 말고,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예단하지도, 우리의 결단과 행위로 의로움을 얻으려고 하거나 인간의 계획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하시는 그 말씀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주님의 뜻을 묻고, 귀 귀울여 듣고 순종하는 것. 그렇게 성령에 이끌려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서원의 내용입니다. 

             서원이라는 행위 자체보다도 중요한 나의 마음을 더 깊이 살펴봅니다. 지난 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고 싶은 마음에 이런 저런 서원을 했습니다. 지금와서 그 서원들을 경시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마음에 걸리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계2:4-5)

             주님의 사랑을 아는 자가 그의 공의로우심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심판이 만난 사건이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에 왕이요 심판자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 서원과 옛 열정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바뀐 것이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바뀐 것이라면, 윗 구절처럼 처음에 하던 일을 저버린 것이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면, 어짜피 모두 용서하셨다며 미지근한 신앙생활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다윗처럼 회개해야 되는줄로 압니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시51:11-12)
         
             내 처음 사랑이 변한 것을 보고도 내가 회개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다시 구원의 기쁨안에서 자발적인 심령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 구원을 사모하는 나는 성령에 반응하지 않고는 못 베기기 때문에, 이로써 나의 구원을 확신하는 기쁨에서 오는 자발적인 마음도 있습니다. 주를 사랑함과 경외함으로, 감격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어 나갑니다. 나의 서원한 것들을 놓고 주님의 도우심을 바랍니다. 내가 나의 서원에 이르렀을 때에 기쁨이 클 줄로 압니다. 



        전도서 6장

        지혜자는 이 땅에서의 안식과 즐거움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함에 있다고 거듭 말합니다. 이는 지금 자신의 처지, 재물, 더 나아가서 인생의 모든 순간들에 만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짜피 인간의 욕심은 채울 길이 없고, 또 짧고 덧없는 인생이 내일 어떤 국면을 맞이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그릇 또는 소명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진정한 순종이란 곧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족, 소명, 순종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6장에서 말하는 이 개념은 5장에서 말하는 서원의 개념과 충돌하는 듯이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서원을 할 때에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하나님의 때가 차기 전에, 주님께서 원하지도 않으시는 일을 나의 예단과 감정을 내세워서 계획하고 결정할 수 도 있습니다.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치기어린 신앙으로 자기 자신에게 몰입한 결과, 결국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말을 아끼고, 한번 서원한 것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참 많은 말을 했고, 그것들을 시편으로 기록했습니다. 그 중의 백미인 119편에서 시인은 말을 아끼기는 커녕 히브리어의 글자 22자로 시작하는 구절을 각 8개씩, 총 176절 에 이르는 시를 지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찬양, 간구, 서약을 동원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 말씀을 지키는 것에 대해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되어 찬양하는 중에 다윗은 많은 서원을 했습니다. 이런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고 말 할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주의 법령들을 지키겠습니다. 나를 완전히 버리지 마소서. (8절)
        "내가 진리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나의 마음을 주의 법도들에 맞추어 놓았습니다." (30절)
        "나는 언제나 주의 법을 지킬 것입니다. 영원토록 순종할 것입니다." (44절)
        "나는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주의 명령들을 지킬 것입니다." (60절)
        "나는 맹세했습니다. 다시금 확인도 했습니다. 내가 주의 의로운 규레들을 따를 것입니다. (106절)
        "내가 주의 명령들을 지키기로 마음을 확실히 정합니다. 바로 마지막 순간까지 주의를 기울여 지키려 합니다." (112절)

        우리가 알다시피, 또 우리가 그리 하다시피 다윗은 범죄했습니다. 자신의 서원대로 살지 못 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은 왕을 크게 치셨으나 용서를 배푸셨습니다.
        그 후에 다윗은 자신의 시편 119편의 한 구절을 다시 읇조렸을 법 합니다.

        "고난받기 전에는 내가 잘못된 길로 갔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67절)

        (서원과 율법을 비롯한 의로움을 향한 인간의 모든 노력은 온전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인간의 죄를 들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

        다시 6장의 말씀의 요지로 돌아가서,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주어진 구원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 예수님의 신부된 교회로 나를 부르신 그 소명에 대해 생각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나의 삶의 순간 순간의 크고 작은 선택들은 어떠한 가치를 갖는 것 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다가도 (고전13:6), 많은것을 다짐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다가도, 또 나의 연약한 육신은 율법의 벽에 부딛혀 넘어집니다. 결국 나와 나의 열심은 죄와 사망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십자가 밑으로 돌아갑니다. 허락된 시간을 해 아래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높으심과 나의 낮음을, 그 간의 무한한 공백을 매꾸신 십자가 사랑을 더욱 알아갑니다. 주님의 높으심과 나의 낮음을 알면 알 수 록 십자가 사랑의 크기를 깨닫게 됩니다. 야다, 하나님을 아는 것. 이것만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가치입니다. 더 알기 원하는 자는 더 알 줄로 압니다. 더 구하는 자는 더 얻을 줄로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사로잡았으므로 나는 더욱 주님을 알기에 힘씁니다. 온전하지 못한 나를 받아주신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심령을, 나의 최선을 왕께 바칩니다. 많은 선택들, 흘러가는 시간들과 쌓여가는 실패들 속에서 나의 마음은 지킵니다.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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