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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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입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창8:7-8,11
어제 주일에 말씀에 큰 은혜가 있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인데 항상 읽어도 까마귀와 비둘기의 의미에 대해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읽곤 하였다.
비둘기는 예수님이 침례하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때 비둘기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고 기록되어있다.
까마귀는 죽은 고기를 좋아하고 노아가 까마귀를 내보낼때 왕래하였다는 이야기는 죽어있는 많은 것을 보고 방황 하였다는 육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 비둘기는 성령님의 예표로 영에 속한자이고 예수님을 말한다고 설명해 주셨다.
노아의 방주가 나무로 만들어 졌고 역청을 발랐듯이 십자가도 나무로 만들어졌고 어린양의 피로 덮여졌다.
즉 역청은 보혈을 의미하고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를 가지고 온것은 새 생명을 가져오고 선포하는것이라는것에 의미가 새로왔다.
십자가는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죽고 살아야 성령님이 오신다.
날마다 죽고 부활하는 삶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말씀에 크게 공감이 들고 은혜가 되었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를 믿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날마다 나는 죽고 주님이 나의 죽을 육체에서 생명으로 나타날때 우린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을 사는것이라는 어제 주일 예배의 말씀이 지금까지 애잔하게 내안에서 맴돌고 맴돈다.
맞아 그것이야 나는 날마다 죽고 내안에 예수님이 날마다 실현되는것 이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말씀이 한번에 좌악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나의 죽음+ 부활(생명) = 예수님과 동행..
이렇게 정리가 되니까 이제 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분명해 졌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들어내기 위해서 나의 자아는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보통 공동체에서도 말씀을 나름 많이 안다고 가르키려고 하고 자신이 아는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그것은 성령님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가 경험하고 깨달은것을 알려주기 위한 자아의식 같은것이라고 생각할수있고 교만이라고도 할수 있겠다.
우리는 그래서 나의 이미지보다 하나님의 이미지에 촞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께 촞점을 맞추면 나는 죽고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날마다 내가 죽어야 예수님이 드러난다는 말씀에 너무 공감이 왔고 조그만것에서 부터 적용해야 겠다고 생각이 깊히 들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공동체에서 우린 쉽게 나를 들어낸다.
그런 나를 주님의 십자가로 가져와 나의 자아의 죽음을 적용하고 예수의 생명을 나타낸다면 그것이 주님과의 동행이고 성령님이 일하게 하시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수련회때 일본에서 사역하시는 이종하 선교사님의 말씀이 문득 생각난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이 여러분을 속상하게 만드세요...
여러분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여러분이 아는 사람들을 통해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들어나지 않을때 그들의 입을 통해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모를때 그것이 여러분을 애통하게 하고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울고 회개하고 원통해 하신적이 있으신가요?
무엇이 여러분을 울게 만드십니까..."
너무나 나에게 천둥같은 하나님의 경고였다.
정말 나는 날마다 죽고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사람인가..
다시금 깊이 생각하는 아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