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에게 바리새인들이 물어본다.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세요??
그 수많은 표적을 보았지만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표적을 보이라고 강요한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잘라 말씀하신다.
악하고 음난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라고 단호히 대답하신다
그리고 더러운 귀신이 돌아다니다가 자기가 있던 곳이 깨끗히 청소되어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귀신을 데리고 들어가서 그 집을 더 형편없이 만들었다고 설명하시면서 지금의 악한시대가 이렇게 될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얼마나 무서운 경고인가..
이미 예수님은 지금의 시대가 악하고 음난한 시대라고 예언하셨다.
이번에 마태복음 강해에서도 요나의 표적이 너무나 중요하게 내 마음에 새겨지면서 일상생활에서 요나의 표적이 다시금 중요함을 공감케 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신다.
*요나가 삼 일 낮, 삼 일 밤 동안 꼬박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삼 일 낮 삼 일 밤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의 날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심판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했기 때문이다.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있다!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 줘도 바리새인들은 도무지 깨닫지못한다.
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과 자신을 비유하셨을까.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성경을 꿰뚫고있고 똑똑하다는 그들에게 너희들이 아는 솔로몬 지혜보다도 자신이 더 크다고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는것이다.
결국 이 세상은 악으로 가득차게 될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어야 한다고 계시하면서 나의 표적은 바로 죽고 부활하는 사건임을 설명하는데 그들은 전혀 무슨말인지 깨닫지 못한다.
죽음과 부활 너무나 중요한 십자가의 사건이 아닌가.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안에서 통과되고 이루어질때 우린 비로서 예수님을 들어내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날마다 나의 십자가을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은 십자가를 통과하라는 말씀인데 내가 십자가에 죽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라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우리안에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살아난다.
그것이 날마다 실제가되고 이루어져 갈때 비로서 우린 예수님을 보게 된다고 믿는다.
예수님을 믿고 보게되므로 나는 죽어지고 주님의 생명으로 우린 살아간다.
예전에는 자존심 상하는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들려지고 누가 나를 비방해도 신경이 날카로와 지지 않는다.
오히려 믿지않는 자라면 불쌍해 보이게 되고 기도하게 한다.
세상사람들은 예수를 모르니까 지멋대로 말하고 자기가 제일 옳은것 같이 살아간다.
그러나 변화된 우리는 어딜가나 예수때문에 참고 예수때문에 성실하게 일한다.
내가 애쓰고 노력하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예수님으로인해 참아지게되고 화목하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안에 있음이 보여지니까 내가 바뀌는것이다.
예전의 나는 없어지고 그냥 예수님 때문에 되어지는 역사를 우린 경험하게 된다.
이제는 내가 사는게 아니라 내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확실히 내안의 불평과 원망이 사라지고 성향이 변한다.
예수님의 성향으로 말이다.
예수님 마음으로 변해있는 자신이 되어갈때 비로서 우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그런자를 주님은 찿으시고 함께 동행하시리라 믿는다.
그런자는 천국을 소유한자이다.
진리는 단순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단순하지 못하기에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그러는것이 아닌가..
십자가...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 사실만 분명히 내안에서 살아서 역사한다면 우린 평생 주안에서 승리하는 영적 상태를 유지 할 수 있을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과 해야 한다.
내가 날마다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나의 죽을 육체에서 예수부활의 생명이 우물가의 생수처럼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아는 자가 바울이 아니던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내게 하려함이라. 고후4: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