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행16: 25-29
그 유명한 바울과 실라의 이야기이다.
오늘 새기때 이 말씀을 듣고 기도후 친교하는데 어느 분이 이런 간증을 하신다.
처음에 우리교회에 와서 동일한 본분을 가지고 다르게 이 말씀을 들었을때 참으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말이다.
만약에 내 경우 바울과 실라같이 감옥에서 기적이 일어나 문이 열렸을때 하나님의 뜻인줄 알고 간수고 뭐고 그 자리를 박차고 감사하다고 외치며 뛰쳐 나왔을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면의 자기의 수준을 보고 충격을 받고 집에가서 참 고민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중심으로 바꾸어지는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간증하셨다.
난 그분과 대화를 하면 속이 다 후련하다.
언제나 말씀을 깨닫는 것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기에 말씀 안에서 늘 많은 것을 나눈다.
난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축복의 교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누구든지 말씀을 나눌수있는 교제권이 있다는것이 제일 큰 복이고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부부가 그런 사이라면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이 아닌가.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옥문이 터지고 큰 지진이 일어나고 모든 문이 열려서 죄수들의 수갑과 차꼬가 풀리므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살리시는줄 알고 도망할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한 영혼 즉 간수를 구원하기 위해 다 잠재우고 간수에게 복음을 증거한다.
한 영혼이 거듭나기 위해 기적도 필요하고, 선한 행동도 필요하지만, 정말 내가 감옥같은 죽음에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를 고백하게 하는 능력이 나에게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아니 내가 그런삶을 살고 있는가 의문이 생겼다.
여기서 간수는 옥문들이 열린것을 보고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앞에 바짝 엎드린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을 하게 한다
"두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간수는 그의 집안에 온가족에게 바울과 실라를 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된다.
참으로 은혜롭고 놀라운 간증이다.
오늘 말씀을 듣는데 내가 나의 자아를 죽어야 예수가 들어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인가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정말 감옥에 까지 갇힐 상태까지 가더라도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감옥에 가서도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양하므로 깨어 있었다.
이 부분에서 너무 충격적이다 .
베드로도 감옥에 갇혔을때 잠자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사가 나타나 옆구리를 쳐서 깨웠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인데도 바울과 실라는 찬양을 하였고 부르짖고 기도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기도하고 찬양을 죄수들이 다 듣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음에 부르짖는 기도를 하였을거라는 상상을 한다.
놀랍지 않은가..
베드로도 바울과 실라도 다들 하나님의 다루시는 부분에서 다르겠지만, 여기서 옥문들이 터지고 큰 지진이 일어나는 사건에도 요동하지 않고, 감옥에서 뛰쳐나가지 않고, 간수에게 차분하게 복음을 증거한다는 자체는 참으로 바울과 실라가 죽음도 불사르고 오직 복음에만 자신들을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과연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간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주님을 만나고 가족들을 전부 다 인도했다.
우린 이렇게 영혼들에게 집중 해야 한다.
그것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의 너의 가정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이 말씀이 성립된다.
그러나 대부분 영혼 구원보다는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에 눈이 동그래진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조그만 도구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영혼에만 관심이 있다.
난 지금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정말 바울과 실라는 영혼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이 만약에 자신들의 사역에 관심이 있었다면 아마도 감옥을 뛰쳐나가 나를 통해 일어난 사건을 간증하고 돌아다닐 것이었다.
그러면 바울과 실라는 세상에서 높이 뜰수는 있지만, 간수는 사형당하고 없어질 사슬이 될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뜻을 꿰뚫었고, 영혼을 사랑하시는 영혼구원의 질서에 집중 하였다.
난 이 말씀을 접하면서 자꾸 나의 모습을 견주어 보았다.
나는 과연 이런 상황 속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말하며 영혼 구원에만 집중할수 있을까 말이다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감옥에 갇히면 부르짖고 기도하며 찬양을 주님께 올릴수 있을까..말이다
정말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걸까..
정말 나는 감옥에 갇쳐도 될만큼 자아가 죽어 있는가 말이다..
나 자신에 대해 심각하게 물었다.
감옥이 아니더라도 그런 마음으로 내가 삶에서 죽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나에게 모욕적인 말과 언사를 들으면 내 마음은 쪼그라든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지만 나의 내면은 요동친다.
어쩌다 직장에서 그런일이 벌어질때, 교회에서 인간 중심의 일들이 보여질때, 나의 내면은 판단으로 요동친다.
이런 모습 하나하나가 다 말씀으로 죽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들어 자주 한다.
주님은 항상 우리의 내면을 다루시기 때문이고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바울과 실라처럼 내가 사각지대에 있어도 주님께 부르짖고 찬양하고 옥문이 터져도 주님이 하셨다고 뛰쳐나가는게 아니라, 한 영혼의 죽어가는 모습에 아파하고, 같이 있어주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 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과 깊이가 나에게 있는가 ..정말 나에게 물어볼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정말 나에게 바울과 실라의 사건은 지나칠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주님은 나에게 바울같이 그렇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은 희생이다.
정말 나는 내 주의의 영혼들에게 사랑으로 희생하고 있는가 .
바울처럼 살으라는 이야기다.
일생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모든 삶을 주님과 영혼 구원에 희생한 바울의 행적은 많은 서신서를 통해 증명된다.
아멘 주님 날마다 나의 내면이 변화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