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때 항상 묵상하는 것은, 주님은 화려하고 건강한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셔도 되는데, 왜 굳히 하찮고 평범한 길거리에 매어있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 했을까 많이 생각하게 한다.
분명히 나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죄많은 우리들의 모습 말이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태우고 천국으로 입성하기를 바라실것이다.
난 정말 예수님을 태운 나귀인가..
예수님은 말씀이신데, 나는 말씀을 태운 나귀인가.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충성스럽게 성실하게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가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주님과 동행한다는 의미나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이나 예수를 태운 나의 모습의 삶이나 모두가 나에겐 동일한 의미로 다가온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8-39
정말 우리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태운 나귀라고 인식하게 되고, 우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자들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을 태우고 낮아진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말이다.
왕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그의 통치함을 받으며 사는가 말이다.
그런 삶은 날마다 말씀을 보고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삶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의 생명의 양식을 날마다 먹어야 우리 영혼이 소생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수가 있기에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면 세상을 어떤 방법으로 이길수가 있을까..
예수님을 모르면 세상과 타협할 수 밖에 없다
간단한 진리같지만 예수님을 아는 삶은 참으로 중요하다.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새롭게 한다.
우리가 말씀으로 충만하면 오직 예수외에 다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기는 능력이 생기고 담대해 진다.
우리가 예수를 모시고 왕의 통치함 받는다는 것은 낮아진 모습과 겸손한 자세이며 그러나 세상에서는 담대하고 지혜롭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자는 평강이 있다.
우리 안에 평강이 흘러 넘치는 자들이 되기 위하여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는 삶이 중요하고,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자세이기에 그렇다.
왜 부르짖고 기도하는가..
우리 안의 자리잡고 있는 견고한 여리고성이 무너져야 하기때문이다.
왜 금식을 하는가..
우리 안에 있는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기 위함이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와 상관없이 주님의 방법이다.
예수님도 나인성과부가 부르짖을때, 나사로가 부르짖을때, 병든아들을 고쳐달라고 아버지가 부르짖을때, 이방인 여자가 자신의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을때, 그리고 많은사람이 예수님을 부르고 소리 치는자를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고쳐주셨다.
이것은 주님의 방법이고 사랑이고 궁휼함이다.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우리는 항상 선택해야 한다.
중요한것은 늘 깨어있는것이고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믿음좋은 가정에도 예기치 않는 일들이 생긴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담대한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도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에서 담대하기 위해서도 더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서 담대해 진다.
신기하게 기도와 말씀의 생활에 꾸준한자는 늘 세상에서도 담대하고 이기는 자가 되어있다.
그래서 주의에서 세상일로 방방뛰어도 우리 믿는자는 담대하고 차분하게 일을 처리하고 참아낸다.
이 마지막때에 우린 담대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것을 다 이기셨다.
모든 아픔, 병, 환란 등..
우리가 할일은 예수님을 힘입어 담대하게 믿음으로 반응하고 외치며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태운 나귀가 되어서 말이다
예수님이 모든 육체의 일과 세상의 병과 고통과 질고를 다 이기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