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다윗을 부르시기 전에 그의 성실함과 책임감, 정직함과 부지런함을 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정말 꼼꼼한 분이시고, 우리의 생각과 다른 분이시란 걸 말이다.
여러가지 세계적인 이슈의 문제도 난 언제나 하나님만 생각한다.
정말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하나님만이 모든것을 주관하시기에 정말 기도로 주님께 올려드리는 일이 제일 시급하다.
주님의 일하심은 늘 이렇게 진행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통해 일을 하시지만 기도하는 자의 통로로 사람들을 움직이신다.
이번에 토론토에서 광란 질주로 인도로 뛰어 들어가서 10명의 사망자와 15명의 부상자를 낸 사건은 남북 대담으로 말미암아 어느순간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진듯 하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
이럴때 우리가 인간 편에서 보면 슬프고 아프기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기에 이런 사건이 발생했나 이런 생각을 해본다.
결론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다.
시리아의 폭격으로 죽어가는 죄없는 서민들과 어린아이들.. 이런 여러가지 사건에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바라봐야 할까.
이런 것을 인간 편에서 보면 안타깝고 속만 터지고 우리 입만 거칠어지고 해결방법이 없다.
단지 이일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지 언제 어느때에 갑자기 주님이 강림하실지 모르는 각박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단지 내 영혼이 주님에게 속하였는가 그리고 우린 영혼구원을 위해 중보하고 있는가 이것만이 우리가 관섭할 일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천국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지옥이다.
아무리 우리가 목소리을 높여도 천국 백성은 하나님께 돌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죽을때까지 우리는 모른다.
토론토 사건을 통해 사망한 사람들 같이 말이다.
우리는 남아있는 유족들이 슬픔에 젖여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중보해 주고 하나님을 원망 하지 않도록 중보하고, 더 하나님을 붙잡고 구원의 길로 가도록 기도해 주는 일밖에 할 일이 없다.
우리의 위로가 무슨 눙력이 있겠는가..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로마 군대 백부장 고넬료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며 구제도 많이 하고, 주님을 성실하게 섬기는 사람이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고넬료와 베드로가 기도 하는 중에 동시에 나타나셔서 환상을 보게 하시고, 베드로를 고넬료 집으로 보내사 복음을 듣게 하시고 말씀듣는 중에 거기에 모인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방언을 말하게 하고 성령까지 임하게 하시는 장면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난 이 장면이 늘 감동적이고 영화같이 다가온다.
그 장면에 가장 놀란사람은 유대인 베드로였다.
이 일을 통해 이방인 사역이 빠르게 시작되었고,
성경에 이방인 중에 고넬료 가정이 처음으로 구원받고 성령이 임한 사역이었다.
그만큼 성실함은 너무나 중요하다.
교회에서도 일을 맡길때 일단 교회에 순종하고 충성된 자에게 맡긴다.
직분에 따르는 것은 충성이라고 바울은 못을 박는다.
그만큼 직분을 받고 나면 우리의 결단과 행위가 중요하다는 말씀이라고 본다.
성실함은 주님이 가장 귀히 보시는 부분이다.
날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십자가가 가로와 세로가 있듯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고집하면 안된다.
그러나 어떤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잘하고 있으면서... 말하자면 교회에 와서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잘내고 예배도 열심히 드리지만 개인적으로 집에 가서는 꽝이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티비를 틀어놓고 드라마와 뉴스, 스포츠등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산다.
성경도 안읽고 기도생활도 없고 직장이나 사업처에서는 물질에 연연하여 돈밖에 모르고 배려 할 줄도 모른다.
그러나 신기하게 교회에는 열심히 나오는 그런사람도 많다.
그러나 어떤사람은 집에서 열심히 말씀듣고 기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잘 이루어가는데 교회에 오는것에 중요함도 모르고, 예배도 중요시 안하고 봉사와 수고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둘중에 어느 편에 쏠려있는가..
어느 한쪽이든 기울어졌다면 아직 자기 중심의 영적인 수준에서 머물러있다고 본다.
자기를 위한 영적생활이다.
복음은 이타적이다.
나의 자아를 죽이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것 말이다.
분명히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우선이지만 그렇다면 교회에 와서도 봉사와 수고에 충성스런 모습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참으로 사랑의 관계가 만들어져가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다.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안에서 작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결혼 관계로 묘사했는데 참 의미있는 말씀으로 들려왔다.
맞다. 교회는 나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우리가 교회에 충성해야 할 이유는 이것이다.
교회가 예배만 드리는 장소라면 그것은 신랑되신 예수님께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내가 남편의 밥을 챙겨주고 사랑하고 연합되듯이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모습이 예수안에서 연합되기 위하여 그리고 서로가 한 마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예배하기 위하여 이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믿는자들이 모여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연합되어지고, 그래서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니이다" 라는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고 말씀 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교회에서 받은 말씀과 교제와 봉사속에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사람들과 부딪치며 우리의 모습이 변화되어 가고 깍아져가며 나아가 가정에서 예배로 이어지고, 말씀과 기도하는 모습이 되어지므로, 세상에서도 예수님의 구속을 나타내는 그렇게 삼박자가 맞아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것은 영적 성장에 정말로 중요한 부분이다.
어느 한쪽도 기울어지면 안된다.
처음에 우린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가..
어쨋든 어디서 예수님을 영접하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드리고 교회에 와서 믿는자들을 만나고 그런 기초적인 작업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거 아닌가
주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셨나.. 생각해 볼때
첮째 계명과 새 계명에 다 포함되어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네 모든 마음과 모든 목숨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계명이다.
두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 처럼 사랑하여라' 인데 이것도 첮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 마22:36-39(쉬운성경)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13:34(쉬운성경)
결국은 예수안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과 예수안에서 사람과 나와의 사랑 즉 한마디로 십자가의 가로와 세로의 사랑이 아니던가.
우리가 이 사실만 제대로 깨달아도 영적생활을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은가..
우리는 내가 무언가 바란스가 안맞는 부분이 있다면 고민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열심은 우리안에 하나님께 충성할때 나오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바란스가 뒤죽박죽이다.
이것때문에 개개인마다 어려움이 올수도 있다.
영적으로 더 바로 잡아가기 위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오르기 위하여 우리가 내적으로 영적으로 더 쌓아올려야 할 부분이 있기에 그렇고, 시련이 통과 할때 우린 더 하나님의 뜻과 길을 알수가 있기에 그렇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고 나아갈때 우린 더 기쁘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평강으로 삶을 살아 갈 수있기에 그렇다.
십자가의 사랑은 이미 부어졌기에 우리가 그 사랑을 나타내는게 우리의 할 일이고 숙제이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야 하는 과정은 어느누구도 면제해 주지 않는다.
우리가 온전히 나타내야 할 구속의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 자는 가정에서도 세상에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함과 구속의 사랑을 나타내고 그리고 교회라는 공동체에서도 성실하게 열심히 충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피해가야 할 사항이 아니고 준수해야할 가장 귀한 사역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