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 복이 와요
자꾸 웃을 일 만들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야죠
그것이 행복입니다
애칭처럼 '막둥이' 됐네'
후라이보이' 곽규석이랑 최고의 콤비였죠
배삼룡과도 잘 맞았고… 그들 생각이 많이 납니다
거실 바닥이며 탁자, 소파가 하도 깨끗해 파리가 낙상(落傷)할 듯했다. 모든 물건이 군대 관물대처럼 반듯하게 각 잡혀 정리돼 있었다. 주인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했다. 이윽고 안방 문이 열리며 구봉서(具鳳書)가 나타났다. 흑백 TV의 이미지로 고형화(固形化)돼 있던 그를 실물로 대면하는 일은, 너무 생생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올해 86세인 그의 낯빛은 매우 건강해 보였다. 멋지게 센 머리는 잘 정돈돼 있었고 쥐색 양복바지엔 주름 하나 없었다. 다만 오래전부터 불편한 왼쪽 다리와 오른쪽 귀에 꽂은 보청기, 그리고 드문드문 핀 검버섯이 한국 희극의 나이테처럼 보였을 뿐이다. 일찌감치 세상 떠난 서영춘, 곽규석, 그리고 1년여 전 병상(病床)에서 영원히 내려온 배삼룡까지, 한국의 제1세대 코미디언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변함없이 후배들에게 격려를 주는 1세대는 구봉서와 송해(85)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방 악극단을 떠돌던 배삼룡은 물론, 작곡가 서영은의 동생 서영춘, 남철·남성남 콤비, 남보원, 이기동, 이상용을 발굴해 TV에 데뷔시킨 구봉서는 어쩌면 코미디언이라기보다 '한국 코미디 최초의 프로듀서'라고 해야 맞을지도 모른다.
지난 11일 서울 잠원동 자택에서 만난 그에게 "'막둥이'란 별명이 1세대 코미디언 중 제일 마지막까지 계실 분이란 뜻인가 보다"고 하자 그가 웃었다.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내가 이제 살 날이 얼마 안 남아서, 자료로 쓰려는 건지 요즘 갑자기 신문·방송에서 인터뷰 요청이 많아요. 너무 많아서 좀 귀찮을 정도예요. 그래서 대부분 다 사양하고 있어요." 그는 코흘리개 때 '웃으면 복이 와요'를 보고 자란 젊은 손님에게 꼬박꼬박 존대했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예전에 영화 촬영하다가 다친 왼쪽 다리를 그 후에 두 번이나 더 다쳐서… 지팡이를 짚어야 걸어 다녀요. 매주 화·목·토요일은 병원에서 신장 투석을 하고, 월·수·금요일은 재활치료를 해요. 일요일엔 교회에 가니까, 일주일 내내 출근할 데가 있는 거지. 바빠요, 아주." 그는 1965년 영화 '광야의 결사대'를 찍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다.
―한동안 서예(書藝)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2년 전에 욕실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친 뒤론 못해요. 그때 뇌수술을 받는 바람에 죽었다는 소문이 많이 났어요. 미국에서 전화가 왔더라고. 혹시 죽었느냐고 물어요. 전화받고 있는 사람한테 죽었느냐고 물어, 참 나."
―작년에 코미디언 후배 100여명을 점심 초대해서 화제가 됐었죠.
"아니 윗대가리 한 열 명쯤 오라고 했더니 100명이 넘게 왔어요. 할 수 없이 다 치렀지."
―그만큼 존경받는다는 뜻이겠죠.
"존경은 무슨… 어려워하긴 하겠죠."
―그 몇 달 전 배삼룡씨가 돌아가셨죠. 그래서 후배들을 대접한 것도 있습니까.
"그게… 나는 옛날 얘기는 안 해요. 약이 올라서."
―약이 오르다니요.
"옛날 얘기 하면 그립고 약이 올라요. 가수 애들이 '내가 젊었을 때 인기가 어쩌고저쩌고' 하면 내가 불러서 말해요. '야, 네가 뭘 그렇게 인기가 대단했니. 그랬다 해도 그게 다 옛날이야. 현실에 살아. 아무리 난다 긴다 했어도 옛날 얘기만 하는 건 바보야.' 삼룡이 생각은 늘 해요. 잠 안 올 때 가만히 생각하죠. 그 자식 있었으면 전화해서 '내일 좀 만나자' 했을 텐데, 그런 생각."―생전에 그만큼 친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걔하고 나하곤 성격이 달라서. 나는 좀 다혈질이에요, 급하고. 걔는… 하여튼 걔가 뛰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아무리 바빠도. 원래 느긋한 사람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갑내기 배우인 배삼룡에 대한 구봉서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는 배삼룡이 병상에서 의식을 잃자 병실에 찾아가 "야 인마, 빨리 죽어. 네가 빨리 죽어야 네 딸들이 고생을 안 하지"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통곡했었다. 그 얘기를 꺼내니 구봉서는 "의식이 없어서 못 듣고 말도 못하니까 '빨리 죽으라'고 그랬지, 아니었으면 그랬겠느냐"고 쓰게 웃었다.
구봉서는 1997년 펴낸 자서전 '코미디 위의 인생'에서 배삼룡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정말 타고난 광대였다. 사람들은 배삼룡이 바보스러운 말을 하는 걸 보며 우월감을 느꼈다. 그런데 일부러 그런 건지 정말로 못하는 건지 모르지만 그는 대사를 외우지 못했다. 대사를 너무 못 외워 극 중 가족 이름도 다르게 부르고, '탕수육 한 접시에 고량주 다섯 병' 해야 할 걸 '탕수육 다섯 병에 고량주 한 접시' 하기 일쑤였다. 시청자들은 그가 일부러 그러는 줄 알고 더 많이 웃었다. 상대 코미디언은 예측할 수 없는 그의 연기와 대사에 맞추느라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는 과장도 잘해서 그의 말은 언제나 10분의 1로 줄어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화폐개혁'이라고 부르곤 했다."
―배삼룡씨보다 곽규석씨와 콤비였다면서요.
"그렇죠. 농심 라면 광고에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했던 것도 규석이죠. 한 10년 전쯤엔가 제가 규석이한테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를 늙은 얼굴로 다시 한 번 하자고 했어요. 걔도 좋다고 하고 농심에서도 좋다 했는데, 그만 규석이가 아프기 시작했죠."(미국서 목회를 하던 곽규석은 99년 71세로 숨졌다)
1926년 평양서 태어난 구봉서는 첫돌을 서울에서 맞은 사실상 서울사람이다. 치과 의료기기상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교동초등학교 시절 이미 라디오에 출연해 '국어 독본'이란 프로그램에서 책 낭송을 했다. 물론 이때 '국어'는 일본어였다. 어려서 오르간을 연주했고, 고교 때 아코디언을 배운 그는 광복되던 해 대동상고를 졸업하고 현제명 선생의 사숙(私塾)에서 그를 사사한 성악가 지망생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당시 최고 인기가수 김정구와 그의 친형 김용환이 이끌던 '태평양 가극단'에 들어간 것이 그 삶의 물줄기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유명한 극단에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는 데 들떠서 아버지께 '딱 사흘만 한다'는 약속을 하고 떠난 게 그냥 내 길이 됐어요. 사흘이 나흘 되고, 나흘이 열흘 된 거죠." 여전히 그는 음악을 사랑한다. 악기는 더 이상 연주하지 않지만 특히 라틴 음악을 좋아하는 그는,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라틴 음악을 들을 때가 많다고 했다.
―코믹 연기는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마포에 있던 도화극장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는데, 갑자기 조연을 맡은 희극배우가 사라진 거예요. 단장이 무조건 나더러 대신 무대에 올라가라는데 정신없이 하고 내려오니 한 선배가 '잘했다'고 칭찬을 해요. 그 길로 영원히 발목을 잡힌 거죠."
―어려서 꿈은 책방 주인이었다면서요.
"나는 대학을 못 다녔지만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요. 그건 모두 어려서부터 읽었던 책 덕분입니다. 초등학교 때 이미 '레미제라블'을 일본어로 읽었어요. 도스토옙스키도 모두 일본어로 읽었죠. 지금도 일본 문예지를 많이 읽어요. '문예춘추'는 매달 꼬박꼬박 읽다가 최근엔 그렇게 못해요. 일본에서 매달 책을 보내주던 친구가 죽었거든. 그래서 요즘엔 문고판 소설을 많이 읽지요. 책을 꾸준히 읽었기 때문에 '웃으면 복이 와요' 원고도 쓸 수 있었어요."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요것도 내가 다 만든 거요"
―'웃으면 복이 와요' 원고를 직접 썼습니까.
"그럼요. 한 2, 3년 썼죠. 그땐 코미디 작가가 없었거든."
―배삼룡씨나 이기동씨도 원고를 썼나요.
"걔들은 책이나 글과는 거리가 멀었어요.(옆에 있던 부인이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하고 묻자) 안 읽어. 걔들은."
―그럼 그때 '배 수한무…'로 시작하는 히트작도 직접 썼습니까.
"내가 썼지요. 일본책 뒤져서 쓴 거예요. 수한무(壽限無),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이게 다 책에 나오는 거죠."
―그럼 '사까이야소 호리호리야소'나 '모리모리 셋뽀리깡'도 일본 책에 나오는 겁니까.
"하하하. 그건 그냥 엉터리로 지어낸 거지. '난다이난다이 지기지기난다이'도 지어낸 거고. 아니, 이 사람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당시에 그걸 본 사람들은 모두 기억하죠. '양반 인사법'도 엄청난 히트였잖아요.
"그건 죽은 박시명이 쓴 원고를 내가 윤색했어요."
'양반 인사법'은 두 상민이 양반이라고 속여 혼담을 주고받는데 등을 맞댄 채 양반 말투를 적은 쪽지를 보며 대화를 하는 내용의 코미디다. 구봉서와 배삼룡이 각각 혼주이고, 박시명이 인사법을 적어 준다. 그 시작은 이렇다. ▲구봉서: 별 밑에 인사법! ▲배삼룡: 그건 제목이오. ▲구: 처음 면상하겠습니다. ▲배: 상면이오. 면상이 아니라. ▲구: 아명은 일봉이라 합니다. ▲배: 아명은…(쪽지를 보여주며) 이거 무슨 글자요? ▲구: 심하다, 심해. ▲배: 아명은 심해라 합니다.
희극인의 길도 희극처럼
가극단 조연배우 잠적해 엉겁결에 무대 올라갔지
잘한다고 칭찬하대요
그 길로 영원히 발목 잡혔죠
이 이야기를 할 때쯤 구봉서의 얼굴에 전성기 때 그 웃음이 피어났다. 그는 "약이 올라서 옛날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여전히 옛날을 생각하면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웃으면 복이 와요' 이전엔 악극단 활동만 했습니까.
"극단에서 악기 연주도 하고 희극 배우도 하고, 6·25 때는 라디오 진행도 했어요. '홀쭉이' 양석천씨하고 둘이 했었죠. 무슨 내용이었는지 다 잊어버렸는데, 하나만은 기억해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 아나운서는 참 예뻤다는 거. 그때 스튜디오에 가면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입은 여자 아나운서가 있었는데, 참 예뻤어요. 하하하. 그리고 KBS 개국, TBC 개국 때도 방송 출연했죠. 개국 때 초대받지 못한 건 이번에 TV조선 뿐일걸 아마?"
―'영화배우 구봉서'는 요즘 사람들에겐 덜 알려졌죠.
"1956년에 '애정파도'로 영화에 데뷔해, 400편 넘게 출연했어요. 그중에서도 1958년에 찍은 '오부자'가 내 출세작이지요. 을지로4가에 있던 국도극장에서 개봉했는데, 제작자가 돈을 엄청나게 벌어서 '국도극장 얼마면 살 수 있느냐'고 말하고 다녔으니까."
나도 영화배우다
'오부자' 등 400편 넘어요 따르는 소녀팬들 엄청났죠
스캔들 있었냐고?
에이, 아내가 듣고 있는데…
'오부자'는 4형제를 장가보내는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 코믹 드라마로, 구봉서는 '영·웅·호·걸' 4형제 가운데 막내인 '걸' 역할을 맡았다. 그때 붙은 별명이 '막둥이'로,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애칭이 됐다. 구봉서는 "그때 처음으로 '인기'라는 것이 내게 있음을 실감했고 '배우도 화장실에 가나요?' 같은 소녀팬들의 질문도 받아봤다"고 말했다.
―여자 팬들도 많았을 텐데 스캔들은 한 번도 없었네요.
"(아내 쪽을 가리키며) 저기 있는데 그럼 있었다고 해야 돼요?"
젊은 구봉서에겐 물론 여자 팬이 많았다. 젊은 시절 '두주불사 청탁불문(斗酒不辭 淸濁不問)'으로 술을 좋아했던 그는 총각 시절 꽤 화려한 연애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눈 감고 손을 뻗으면 걸리는 게 여자일 만큼 여자가 많이 따랐다"고 했다. 그러나 스캔들이 없었던 데 대해서는 "본래 스캔들이란 남이 지어내서 퍼뜨리는 게 아니라 당사자들이 표시를 내기 때문에 나기 마련"이라고 썼다. 그는 아내 정계순(74)씨를 중매로 만나 두 달 만에 결혼했다. 6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젊고 건강한 정씨는 구봉서의 노년에 큰 힘이 되는 듯했다. 정씨는 "우리가 결혼할 때도 덕성여고 애들이 '오빠, 오빠' 하면서 따라다녔어요. 그 애들이 얼마 전까지도 찾아오고 그랬어요. 다들 같이 노인이 돼가는 처지인데도요"라고 했다.
코미디 없앤다? 택시 없애!
70년대 문공부장관이 코미디는 저속하다고 난리야
박정희 대통령께 달려갔지
어쩌긴? 없던 일 됐지
―박정희 대통령에게 '코미디 없애려거든 택시도 없애라'고 했다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70년대에 문화공보부 장관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코미디를 모두 없앤다고 했거든요. 그때 마침 박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 나하고 곽규석이 갔어요. 내가 '저속한 코미디 한두 개 있다고 코미디를 다 없앨 거면, 가끔 교통사고 내는 택시도 모두 없애야겠네요' 식으로 말했죠.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웃더라고요. 그래서 없던 일이 됐죠."
시인 양병호는 '구봉서와 배삼룡'이란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일 밤 웃고 웃어도/ 와야만 할 복은 기별조차 없는데/ 흑백으로 단순명쾌한 세상은/ 빚 독촉하듯 서두르며 출렁출렁 흘러만 갔다" 구봉서는 "'웃으면 복이 와요'를 군사정권 시대의 마취제로 해석한 사람도 있다"는 말에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나는 그저 주어진 무대에서 배우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웃으면 복이 와요'는 1985년에 폐지됐죠.
"좋은 작품이 안 나오더라고요. 나도 지쳤고. 우리가 아이디어 다 짜내서 주면 작가가 그거 엮어서 고료 받고, 우리한테는 여전히 얼마 안 나오고. 코미디를 너무 우습게 봐요. 지금도 개그맨들 하는 거, 그거 다 걔들이 직접 하는 거예요. 얼마나 받고 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사업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했죠. 한 번 했다가 망했어요. 처남이 하는 재생 플라스틱 사업에 돈을 대고 '회장' 직함까지 얻어서 우쭐했었죠. 그리고는 오일쇼크가 와서 완전히 망해 집까지 날리고…. 그 뒤로는 절대 욕심 때문에 내 일이 아닌 것에 덤비지 않아요."
―배삼룡씨도 음료수 사업을 했다가 망했었죠.
"그게 원래 나한테 왔던 겁니다. 나한테 누가 찾아와서 '아무 일 할 필요 없고 회장 직함 갖고 이름과 얼굴만 빌려달라. 그러면 수익을 드리겠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 좋은 걸 왜 나한테 가져왔느냐'며 거절했죠. 그걸 삼룡이가 덥석 하겠다고 하더니 망한 거예요."
난 재미없는 남편·아빠였다
애들이 날 우습게 볼까봐 코미디도 못 보게 했다
'얼마 줄테니 한번 웃겨봐' 이 말이 제일 싫었으니까…
―한국을 대표하는 희극배우였으니 무척 재미있는 아버지였겠네요.
"그 반대였죠. 나는 아주 재미없는 남편에다가 무서운 아버지였어요. 아들 넷을 뒀는데, 어렸을 때 코미디를 일절 보지 못하게 했어요. 아이들 친구들이 코미디언 흉내를 내고 내 이름을 친구 부르듯이 했으니까요. 나는 아이들이 아버지인 나를 우습게 알까 걱정했어요. 그래서 코미디를 못 보게 했죠. 그런데 아이들이 내가 아버지인 걸 감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친구들이 '너희 아버지가 코미디언 구봉서냐?'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아니, 이름만 같은 구봉서야'라고 했거든요. 그렇지만 결국엔 알려질 수밖에 없었어요. 아이들은 친구들이 '너희 아버지 되게 웃긴다'고 말하면 '그게 웃기는 거냐? 연기하는 거지'라고 쏘아붙이고, 때론 그런 이유로 친구와 싸우고 들어오곤 했지요."
―지금껏 살면서 언제가 가장 힘들었습니까.
"모르는 사람이 '얼마 줄 테니 한번 웃겨보시오'라고 말할 때예요. 정말 그럴 때는 그 사람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어요. 아이가 어릴 때 소풍에 잠깐 들렀더니 선생님도 같은 반 아이들에게 '구봉서 아저씨가 오셨어요. 우리 재미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라고 하더군요. 코미디언이라고 언제나 누구 앞에서나 웃겨야 하는 건 아니죠."
―그럴 땐 어떻게 힘들고 괴로운 것을 이겨냈습니까.
"이기긴 뭘 이겨요. 그냥 꾹 참는 거죠. 아니면 술 한잔 먹고 잊어버리거나."
그렇게 말했지만 희극배우란 직업에 대한 그의 긍지는 대단하다. 작년에 개그맨 이홍렬이 공개해서 화제가 된 편지가 있다. 이홍렬이 일본에서 공부하던 1991년 구봉서로부터 받은 것으로, 편지지 5장을 꼬박 채운 이 글 말미에는 "한국의 코미디언은 한국인의 평균수명을 연장시키는 사람들"이라며 "자네가 귀국하면 한국인 평균수명이 100세는 되리라 생각하네"라는 구절이 있다.
―노년을 보내는 데 종교가 큰 힘이 됩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기독교를 정말 믿기 시작한 건 마흔이 넘어서예요. 그때 우리 집 안방에서 시작한 성경공부에 고인이 된 하용조 목사가 전도사로 참여했고, 남진·서수남·윤복희·정훈희·김자옥도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우리 집 안방이 좁아지면서 세운 게 연예인교회예요." 1976년 서대문에서 시작한 연예인교회는 현재 '예능교회'로 이름을 바뀌어 수많은 연예인이 일요일마다 찾는 곳이 됐다.
―아프리카에 '구봉서 학교'가 있다면서요.
"글쎄, 그렇게 부른다고 하네요. 다리가 아파서 가보지도 못했는데…." 부인 정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전도집회 나가서 사례받은 걸 꾸준히 기부했더니 그 돈으로 우간다에 학교를 세웠대요. 너무 멀어서 못 가봤는데, 그 학교에 그런 이름이 붙었대요."
―사람이 행복해서 웃는 겁니까, 아니면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까.
"…웃기 때문에 행복한 거예요. 자꾸 웃고, 웃을 일을 만들고, 웃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거죠. 말 그대로 웃어야 복이 오는 거예요."
―희극배우로 데뷔한 지 67년이 됐습니다. 그 외길 인생은 희극이었습니까.
"글쎄요… 워낙 내 인생이 비빔밥이어서 한 가지로 말할 수가 있나…."
구봉서는 안방 침대 옆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며 "나 죽으면 저 사진 나올 거요"라고 말했다. 배삼룡의 부음을 듣고 그가 한 말도 "이제 내 차례인가 싶다"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일요일엔 온 가족과 점심을 함께하며 고요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명대사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구봉서는 총을 맞은 뒤, "죽으면 안 돼!"라고 외치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금 죽으면 너희를 누가 웃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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