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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날짜 : 2014. 05. 26  글쓴이 : 민정기 목사

      조회수 : 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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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요즘 유병언을 포함한 구원파 신도들의 행위가 도마에 올라와 있다. 한 달여 동안 세월호의 침몰과 구조에 관한 문제 그리고 애도의 물결이 세상을 휩쓸더니, 며칠 전부터는 유병언과 그 일가의 체포와 재산에 관한 문제로 뒤숭숭하다. 그리고 세월호 침몰에서 비치기 시작한 구원파의 행태가 유병언의 탈법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전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들을 구조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만 먼저 빠져 나온 행동이 타이타닉호 선장의 책임감과 비교되었다. 세월호 선장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선장의 책무를 저버린 무책임한 행동을 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 많은 어린 생명들을 구하려 하지 않은 그의 행동에 대해서 온 국민이 분노했다. 오랫동안 뱃일을 해온 그가 그런 경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몰랐을 리 만무하고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판단력이 흐려졌을 리도 없다.

        그러면 왜 그가 그렇게 행동했을까? 그의 그러한 행동은 그가 몸담고 있는 구원파의 교리와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원들이 하선하기 전에 회사의 책임자들과 통화했다고 하는데 자기들의 행동에 관해서도 그들과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구원파에는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의 깨달음을 얻은 후에 죄를 지어도 구원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교리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죄를 지어도 죄의식을 갖지 않을 것이다. 구원파 신도인 세월호 선장의 경우 그가 선장으로서의 책임을 외면한다 하더라도 그의 구원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구원파의 지도자 유병언 일가의 행태가 선장의 행동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구원파의 교주인 유병언은 그동안 횡령, 배임, 조세포탈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돈을 벌고 교인들을 착취해온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검찰의 소환에 응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들이 모두 잠적해 버렸다. 그들의 도덕적 해이와 탈법적, 초법적 행동은 바로 그들이 표방하는 교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죄가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까 죄를 지으면서도 구원에 대한 염려를 할 필요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도 없다. 세상의 법은 일시적이고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하기 때문에 일시적인 세상의 법을 무시하고 탈법적으로, 비도덕적으로 행동해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개신교인들은 이러한 구원파는 이단이어서 그 이름이 개신교의 호적에서 지워졌으니 개신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개신교의 피를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구원파는 애당초 장로교의 권신찬 목사에서 비롯되었고 그들은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린다. 침례신학대학교의 모 교수가 T.V. 대담에서 구원파가 ‘침례교’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침례교에 타격이 크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맨 앞에 내세운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에도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렇지 않아도 개신교의 지도자들이 돌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의 입줄에 오르내리는 때에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신도들과 지도자가 이렇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으니 그들이 개신교의 호적에서는 지워졌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편치 않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호적에 있는 교회나 호적에 없는 교회가 모두 비슷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서너 달 전에 교회 비리로 재판에서 실형을 받은 여의도 목사의 행태와 유병언의 행태에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 사람이나 이 사람이 동류로 보일 것이다. 여의도의 목사도 한때는 이단으로 취급되다가 한참 후에 그 혐의를 벗었다. 그런데 이단으로 몰렸던 그 목사 역시 현재 이단인 유병언과 마찬가지로 교회재정을 유용하고 부인을 포함해서 자녀들을 교회의 재정으로 세운 교육기관이나 사업체의 책임자로 세우고 그 사업체들을 지원했다. 유병언이 구원파 신도들을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 위에 군림하고 자신을 우상화한 것처럼 여의도의 목사도 비슷한 일을 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그가 비리를 저질러도 법정에서 실형을 받아도 그것은 모두 모함이며 그 사람이 겪는 시련이라고 말하면서 무조건 그를 옹호한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 목사는 유벙언의 사촌쯤으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행위와 관련된 바울과 루터의 칭의 교리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

        유 병언 외에도 박옥수와 이요한 같은 구원파의 무리들이 있는 것을 보면 칭의 교리를 해석할 때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혁자 루터조차도 바울의 칭의에 관한 언급을 해석하면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지나치게 몰고 나가서 믿는 사람의 행위를 외면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가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 야고보서와 요한계시록을 성경에서 제외하고 싶어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구원파의 사람들은 루터의 칭의 교리를 한 걸음 더 끌고 나간 결과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행 위를 외면한 루터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비인간적인 행동을 했다. 영주들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영주들에게 반대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자 루터는 그를 옹호해 주던 영주들에게 농민들을 잡아 죽여도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한 잔혹한 행위에 관여한 것을 훗날에 가서야 후회했다고 하니 행위를 외면한 그의 칭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그의 삶을 통해서 드러났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바울의 의인론에 대한 루터의 해석을 가감 없이 받아들여서 믿음으로 의인이라고 인정된 사람은 행위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 왔다. 혹은 믿는 사람은 선한 행동을 하려고 힘쓰지 않아도 성령이 인도하셔서 죄를 짓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이, 예수님을 닮는 일이 그렇게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위를 중시하지 않는 루터의 칭의 교리를 받아들여서 그 교리를 날마다 묵상하고 가르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지고 육신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 온갖 비리에 관여하고 있다. 여의도의 목사 한 사람만 비도덕적이고 탈법적이면 크게 문제될 일이 없을 것이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그가 한 것과 유사한 일을 양심의 가책 없이 자행하고 있기 때문에 비상이 걸리게 된다.

        목사들이 명예욕, 권력욕, 재물욕, 음욕, 권위주의, 이기주의, 파벌주의 등에 사로잡혀 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각종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임은 ‘목피아’의 잔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일전에 한기총의 부회장이 세월호를 탄 학생들에 관해서 철없는 소리를 해서 구설수에 오르고 결국 부회장직을 사퇴하는 일이 생겼다. 이렇게 목사들의 부도덕한 언행이 우리를 실망시키고 안타깝게 한다. 그들의 행태에 실망한 교인들이 이리저리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다니다가 실망해서 결국 교회를 떠나고 만다. 그래서 개신교인의 수는 해마다 줄어들고 전도의 길은 막혀간다.

        개혁자들의 후예들이 너도 나도 나서서 기독교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인도가 날로 추락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들은 그렇게 지탄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바울 서신을 해석하면서 믿는 사람의 행위까지도 외면한 루터의 칭의 교리를 개혁자들의 후예들이 무비판적으로 추종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들을 비롯해서 그들의 지도를 받은 교인들이 행위를 소홀히 한 결과 한국교회가 이렇게 부패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믿는 사람의 행위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중시했다는 점을 바로 알아야 한다.

        믿는 사람의 행위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왜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했는가를 언급해야겠다. 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반복적으로 율법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대립시켰다(롬 3:19-28; 갈2:16; 갈 3:2,5,9-10). 여기서 바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율법만 지켜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면서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서 믿음이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 율법에 의지한다고 해서 구원 받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구원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 울은 결코 믿는 사람이 행위를 소홀히 해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믿음이 없는 사람이 그의 행위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실상 바울은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기 위해서 힘써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울이 믿는 사람들의 행함을 말할 때, 믿는 사람은 믿음의 법을 따라야 하고(롬 3:27),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엡 5: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살전 4:1), 예수 안에서 행해야 하고(골 2:6), 심지어 바울 자신을 본받아야 한다고(빌 3:17) 말했다. 믿는 사람은 성령을 따라 행하면서(갈 5:16).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런데 믿음의 법을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 예수 안에서 행하면서 예수님을 닮고 바울을 본받는 것, 그리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고 말했다. 이 말은 날마다 자신을 쳐서 십자가에 못 박은 바울 자신의 삶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했다. 자신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고 말한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투기, 비방, 악한 마음, 욕심을 버리고 경건, 자족, 사랑, 인내, 온유를 따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고 충고했다. 육체의 법과 하나님의 법 사이의 갈등에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 위한 노력을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선을 행하기 위한 노력을 ‘싸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한 것을 보면 믿음의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바 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육체를 위하여 심지 말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라고 말한 다음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고 말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13)고 거듭 부탁했다. 여기서 바울은 먼저 믿음의 사람들은 선을 행하려고 진력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선을 행하는 일은 도중에 낙심하고 포기할 마음이 들 만큼 힘든 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서 2시간 이상을 달려야 하는 마라톤 선수가 기진맥진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

        바울은 왜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 해서 선을 행하라고 말했을까? 디모데전서에서 그 이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의 경우에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6:10). 그리고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은 “영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6:12). 이러한 디모데 전서 6장의 말씀은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야고보서 2장 14절의 말씀과 통한다. 바울에 의하면,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에 굳게 서려면 그리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그런데 루터는 바울이 믿음 없는 사람의 ‘율법의 행위’와 믿음 있는 사람의 ‘선한 싸움’을 구분한 것을 읽지 못하고 칭의 교리에만 몰두해서 믿는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루터를 따라서 선한 싸움에 매진하지 않은 결과 오늘날 한국교회가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믿음의 사람이라도 선한 싸움을 힘써 싸우지 않으면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타락하게 된다.

        그리고 목회자들의 삶에서 그들이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갖추지 못한 것을 흔히 발견한다. 특히 성직자는 고매한 인격을 갖추어서 그 인격의 향기가 그의 삶에서 풍겨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입으로는 열거하지만 그들의 삶에서 그 열매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바로 인격의 변화를 말한다. 믿는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살면서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오랫동안의 살을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믿음만을 내세우고 행함을 게을리 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달리 말해서 고매한 인격을 갖출 수 있겠는가?

        그 러면 왜 선을 행하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가, 성령 안에서 행하기가 그렇게도 힘이 드는가? 바울이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인간에게는 육체의 본능적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본받으라고 충고한 믿음의 사람 바울도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기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안에서 하나님의 법과 육체의 법이 싸운다고 말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자신임을 고백하면서 믿음의 용사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탄식했다. 바울이 그렇게도 힘들어 한 것은 믿음을 통하여 의인으로 인정받은 그도 본능적 욕구에 끊임없이 시달렸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바울이 말한 죄의 법과 하나님의 법 사이의 싸움을 본능적 욕구를 분출하는 이드와 이드를 제어하는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설명했다. 그는 그의 정신분석 이론에서 정신 과정을 이드, 자아, 초자아의 세 가지 정신 영역에 할당했다. 이드는 본능적 욕구를 위한 만족을 얻으려는 충동으로 끓어오르는 가마솥이다. 이드는 사회의 관례나 윤리, 도덕적 자제를 고려하지 않고 쾌락을 위한 인간의 본능을 만족시키는 일을 하려고 한다.

        자아는 개인을 보호하고 정신을 다스리는 합리적인 작용을 한다. 자아는 이성과 신중을 나타내고 이드의 본능적 충동과 초자아의 도덕적 체계 사이의 조정자로 작용한다. 그리고 초자아는 도덕적 검열에 작용하는 양심과 긍지의 저장소이다. 초자아는 이드의 충동을 억압하거나 금지시키는 일을 하고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본능적 욕구의 충동을 막거나 그것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는다.

        본능적 충동인 이드는 우리를 악마로 만들려고 하고 도덕 원리인 초자아는 천사처럼 행동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죄는 이드의 작용이고 성령에 따라 살게 하는 것은 초자아의 역할이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법이 강화되지 않으면 이드 혹은 육체의 법이 제어되지 못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요즘 한국교회의 타락한 목회자들의 경우에 프로이트의 초자아, 바울의 하나님의 법이 약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결과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육체의 법을 제어하지 못해서 본능적 욕심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성 경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인간의 죄성은 프로이트가 말한 이드의 본능적 충동이나 바울이 말한 죄의 법과 상통한다. 에덴동산의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한 사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들의 아들 가인은 하나님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동생 아벨을 죽였다. 하나님은 노아의 시대에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보시고 인간을 홍수로 전멸시키셨다. 그리고 성과 탑을 쌓아 하늘까지 닿으려는 인간의 욕심을 보시고 그들의 바벨탑을 허물었다. 이렇게 창세기의 태고사에서는 반복적으로 하나님에게 도전하거나 하나님의 처사에 불만을 품거나 쉽게 죄악에 물드는 인간의 죄성을 강조한다.

        태고사에서 나타난 인간의 죄성은 그 다음의 세대들에서 거듭 나타난다. 신약에서도 죄의 문제는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신구약 전체에서 인간은 은혜를 저버리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인간은 쉽게 본능적 욕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를 짓는다는 사실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아담의 범죄에서 원죄를 보면서 인간의 죄성을 신학의 중심 문제로 삼고, 이 죄의 문제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구축했다. 바울은 이 죄의 용서를 자신의 신학의 핵심으로 삼았고, 칼빈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조했다. 이토록 악한, 죄에 물든 인간이 예수를 믿음으로 의인으로 인정받기는 하지만, 그 뿌리 깊은 육체의 법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하게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간곡한 편지를 보냈다.

        루 터는 믿음 있는 사람의 선한 삶을 위한 노력을 중시하지 않았다. 행위에 치중하는 가톨릭에 맞서서 ‘오직 믿음’을 내세운 루터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바울의 말에서 그 모토의 성경적 근거를 찾아냈다. 자신의 모토와 바울의 주장이 상통하는 데서 루터는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확신을 얻었고 그 확신이 그에게 일종의 고정관념으로 작용했다.

        이 렇게 고정관념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듣는 것이나 읽는 것에 대해서 선입관의 틀 안에서 반응하게 된다. 예수님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대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혁자 루터도 행위에 관한 그의 선입관으로 인해서 바울 서신에 나오는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구절들을 간과하게 되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강조한 바울은 행위를 외면한 루터를 따르다가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된 한국교회를 보고 당신들은 왜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느냐고 책망할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인정받았지만 육체의 욕심을 극복하면서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울이 경험했고, 프로이트가 주장했고, 성경에서 강조한 대로, 인간에게는 육체의 법, 이드, 죄성이 있어서 하나님의 법에 대립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도 방심하면 본능적 욕구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 리가 육신의 법에 휩쓸릴 때 영생을 성취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야고보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2:17)이라는 언급은 외워서 그냥 마음에만 담고 있을 것이 아니다. 힘써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 사람, 선을 행하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영생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고 바울은 힘주어 말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조언한 대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한다. 그 싸움은 중도에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다. 지금은 기독교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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