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신 척결로 '탈-주술' 이뤘을까 |
"모든 구원 욕구는 하나의 '곤궁'의 표현이며, 따라서 사회적 또는 경제적 압박 상태는 구원 욕구 발생의 매우 효과적인 원천인 것은 당연하다." - 막스 베버, <경제와 사회>, '신분 집단, 계급 그리고 종교' 중
일찍이 막스 베버(Max Weber)는 '곤궁' 상태와 '구원 욕구'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권위 있는 학자 말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는 경험에 비추어 안다. 누구도 지금의 곤궁이 나중까지 이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훗날에는 더 여유로운 삶이 펼쳐지길 기대한다. '구원'이라는 속성을 가진 종교는 이 틈을 비집고 들어선다.
생각해 보면 우리 역사도 그랬다. 전쟁의 폐허가 안긴 지독한 가난은 장밋빛 미래에 마음을 둔 채 버텨야만 지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즉 구원 욕구는 지극히 본능적인 생활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한국교회는 적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영역을 확장했다.
삶이 너무 허덕이다 보면 신앙이 주술적인 데로 치우치기 쉽다. 흔히 주술이라고 하면 서낭당이나 부적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주술은 삶의 형편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 놓고 표현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미신 척결에 앞장섰던 한국교회 안에 주술적인 모양새는 찾기 어려워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서낭당, 부적 같은 주술적 매개체들을 주변으로 밀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빈자리를 '기독교식 광란의 은총 수여'가 대신했다. 굿이 아니라 예배로, 마을 어귀가 아닌 예배당으로, 토속적 가락이 아닌 서양식 가락으로, 무당이 아닌 성직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탈-주술이 아니라 다른 양상으로 지속됐다.
2. 누가 끊임없이 주술에 기대는가 |
본디 주술은 일시적이라도 효험이 있다고 판단이 서야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자취를 감추게 마련이다. 구세론적 광란 축제로 변모해 한국교회 안에 기생한 주술은 시대적인 호황과 맞물려 다수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그 사이 가난의 기억 위로 풍요가 덧대는 경험을 한 세대는 사회적으로 상류층(중산층)으로 올라섰고, 교회 안에서는 중역이 됐다. 그런데 이렇게 고양된 계층 의식은 주술의 양상마저 바꾸었다.
"사회적․경제적으로 긍정적 특권을 가진 계층이 스스로 구원 욕구를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이들은 종교에 자신들의 생활양식과 삶의 상황을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요구한다. (중략) 자신이 많은 복을 가졌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은 복을 누릴 '권리'를 가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 즉 복을 덜 가진 자에 비해 자신은 복을 '받아 마땅하다'는 의식, 그에 반해 상대방은 불행한 것이 '마땅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 막스 베버, <경제와 사회>, '신분 집단, 계급 그리고 종교' 중
곤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구원 욕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됐다. 지금 자신이 누리는 풍요가 종교적으로도 정당하다는 근거가 필요할 따름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 대다수 이미지가 정치·경제·문화의 지형도에서 보수를 향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베버는 구원 욕구가 강할 수밖에 없는 하층민과 보수 성향을 지닌 상류층(중산층)을 각기 나누어 분석했다. 하지만 특수하게도 한국은 시대만 달리할 뿐 동일 세대(인물)가 하층민과 상류층(중산층)을 모두 경험했다. 바꿔 말해 이들 자신이 주술의 양상이 바뀌는 전환점의 주체들이었다. 이들은 미신 척결에 앞장선 자들이었고, 기독교식 광란의 은총 수여를 갈망하던 자들이었으며, 자신이 누리는 풍요와 계층을 정당화하고자 종교에 기댄 자들이기도 했다.
3. 주술 넘어서는 신앙은 가능한가 |
한국교회는 여러 시대를 지나는 동안 사회적 계층 이동을 경험한 자들이 이끄는 주술의 전환과 함께했다. 그리고 매 시기마다 전환된 주술성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언뜻 생각하기에도 기독교 신앙이 주술로 점철되는 것이 옳을 리 없다.
구원이라는 개념도 곤궁한 '내'가 구원받은 '나'로 바뀌는, 수혜자인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진다면 '나'를 위한 주술에 불과하다. 곤궁에 처한 내가 되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거나 구원받은 안도감에 취할 뿐, 궁극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초점을 '나'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도 한낱 인간의 주술을 위해 신이 지불한 게 되고 만다.
장기적인 불황은 젊은 세대로 하여금 이전 세대가 걸어온 주술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만들고 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주술, 구세론적 광란 축제에 젊은이들이 내몰린다.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을 위로하되, 교회가 주술의 장으로 변질되는 건 막아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다가오는 시대에도 그들이 얻은 풍요를 종교에 기대어 정당화할 구실을 찾아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내 삶의 형편에 비춰 찾기 시작하면 그분은 항상 뒤로 숨으신다. 사실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분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찾고 갈망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야 주술이라는 우상을 넘어 그분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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